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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학이 한국에 처음 들어온 그때만 하더라도 서양의학은 우리들에게 낯선 의학이였다. 특히 여성들의 인권이 낮았던 그 시대에는 여성들이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일이란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그런 일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여성환자들을 위해 일생을 받친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있다. 그 이름은 바로 "김점동"이다.


1876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점동은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이자 미국 유학생이었다. 딸만 넷인 가난한 집안의 막내 딸로 태어났지만 개신교 선교사였던 헨리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을 봐주던 아버지 덕택으로 일찍이 영어와 서구 문물을 접할수 있게 되었다.

<이화학당 모습>

이후 이화학당에 네번째로 입학을 한 김점동은 그곳에서 한글,성경,산수 등의 학문을 배울수 있었다. 이때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스크랜턴 대부인의 추천으로 의사로 한국을 내한한 로제타 셔우드(Dr. Rosetta Sherwood)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통역을 하면서 병원의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일을 도와주던 김점동은 어느날 인생이 바뀔만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언청이라고 불리는 병이 걸린 한 여자 아이가 병원에 왔는데 당시 한국의 의술로는 도저히 치료를 할수 없는 불치병으로 평생 놀림을 받고 살아야 될 그런 병이였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수술을 하면 나을수 있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대로 수술후 아이의 병은 곧 낫게 되었고 이 모습을 본 그녀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치료만 하면 쉽게 나을수 있는 병도 방치를 해 악화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녀는 이러한 조선의 여성들을 위해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의학을 공부하던 중 로제타 셔우드의 남편이였던 윌리엄 홀의 소개로 박유산을 소개를 받는다. 이들은 선교사부부의 중매로 1893년 한국 최초로 교회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때부터 남편성인 박씨와 세례명인 에스더를 합쳐 "박 에스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19살이 되던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896년 만 20세가 되던해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에 최연소로 입학하게 되었다. 남편 박유산은 뉴욕의 농장에서 일을 하며 그녀를 뒷바라지 했다. 하지만 그녀가 졸업하기 반년을 앞두고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보우여관의 모습>

"꼭 의사가 되라"는 남편의 유언대로 1900년 6월 한국 여성 최초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박에스더는 미국에서의 보장된 생활을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 오게 된다. 귀국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맡아 운영하게 된다. 후에 이 보구여관은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이 된다. 귀국후 10개월동안 진료한 환자가 3천명이 넘었을 정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환자 진료에 힘섰다.



이렇게 여성환자들의 진료에 앞장섰던 그녀는 미처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1910년 4월13일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34세로 아직 꽃도 피워보지 못한 나이였다. 이후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로제타 홀의 아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발매하게 된다. 또 후에 그녀의 공로와 업적을 인정 받아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게 되었다.